
설교 중에 '공공'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예배당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목회자라면 그 순간을 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고, 누군가는 속으로 '이 목사, 혹시 그쪽인가' 하고 묻는다. 신학교 강의실에서 공공 신학은 이미 익숙한 말이 되었다. 학회지에는 해마다 관련 논문이 실리고, 교단을 가리지 않고 세미나가 열린다. 그런데 그 말을 품고 주일 강단에 서는 목회자는 드물다. 이 글은 묻는다. 공공 신학은 한국 교회에서 환영받는 신학인가, 소외당하는 신학인가.
강의실에서는 환영, 강단까지는 아직
나는 어느 한쪽으로 답하지 못한다. 굳이 한 문장으로 말하라면 이렇다. 공공 신학은 강의실에서는 환영받지만, 강단까지는 내려오지 못한 신학이다. 그리고 그 신학이 정말 복음의 언어인지는, 우리가 가장 낯설어하는 이웃 앞에서 판가름 난다.
두 개의 선입견, 두 개의 한계
첫 번째 선입견은 '교회가 사회를 말하면 진보다'라는 등식이다. 한국 교회에서 사회 참여는 오랫동안 특정 진영의 이름표처럼 쓰였다. 해방 이후 에큐메니컬 진영과 보수 진영이 갈라선 역사가 그 배경이다. 한쪽이 민주화와 인권을 외칠 때 다른 쪽은 영혼 구원과 교회 성장에 힘을 쏟았고, 그 구도가 굳어지면서 교회가 공적 문제에 입을 여는 일 자체가 진보 신학의 표지로 읽히게 되었다.
이 경계심은 보수 개혁주의 신학자의 글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보인다. 고신대 송영목 교수는 2020년 『하나님 나라 복음과 교회의 공공성』에서, 한국 교회가 공익보다 신자의 사익을 좇는다는 비판의 뿌리를 개인주의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복음주의에서 찾았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교회일수록 진보 신학의 사회 참여론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숨기지 않았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자리에서 공공성을 변호하려는 저자조차 이 경계심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다. 2021년 『한국개혁신학』에 실린 김민석의 논문도, 한국의 보수 교회가 공공 신학을 의심스러운 접근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두 번째 선입견은 공공 신학을 '회색 지대의 신학'으로 보는 의심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절충이 아니냐는 의심, 1970년대 상황 신학을 새 이름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는다. 공공 신학이 두 진영 사이 중간 지대에 머문다면 곧 실패할 거라는 경고도 있고, 공공 신학을 주류 신학이나 상황 신학의 연장쯤으로 여기는 시각을 넘어서라는 호소도 같은 맥락이다. 복음주의가 내세운 정치적 중립이 결과적으로 주류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 복음주의 독자에게는 아픈 문장이다. 그러나 아프다고 해서 틀린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첫째는 '번역되지 않은 언어'다. 한국 교회가 공론장에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원인으로 공공성의 상실과 기독교 공공 지성의 부재가 꼽힌다. 시민들이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해도 번역되지 않은 종교적 언어 때문에 소통이 끊긴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로 세상에 말을 걸면, 세상은 그것을 메시지가 아니라 소음으로 듣는다. 교회 성장을 최우선에 둔 목회 구조 속에서, 공적 문제를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시민의 언어로 옮기는 수고는 늘 뒷순위로 밀려났다.
▶둘째는 공공 신학이 스스로 답해야 할 질문이다. 복음주의의 경계심이 모두 오해는 아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가 특정 세력과의 정파적 연대로 비칠 때 교회는 당파적 이익집단으로 보이고 공신력을 잃는다는 경고도 있다.
반지성적 경향의 극복도 과제로 꼽힌다.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윌리엄 캐버너는 2002년 저서 『신학적 정치 상상(Theopolitical Imagination)』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있다. 교회가 근대 국가가 정한 '공공'의 문턱을 넘는 대가로 고유한 진리 주장을 내려놓고, 시민에게 동기와 가치만 공급하는 장치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상징이 사회윤리라는 분쇄기를 거쳐 정책의 언어로만 소화된다는 비판이다. 복음이 사회윤리로 희석될 수 있다는 염려는, 공공 신학이 피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숫자가 가리키는 자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26년 2월 발표한 조사에서,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0%,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였다. 불신은 2008년 조사 시작 이래 가장 높았다. 응답자의 47.1%가 교회의 이념 성향을 극우로 평가했는데, 이는 '대체로 극우' 23.2%와 '보수인데 일부만 극우' 23.9%를 합한 수치다.
목회자의 정치적 발언과 집회 참여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88.5%였고, 기독교인 안에서도 반대가 83.0%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시민들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활동으로 윤리·도덕 실천 운동(58.6%)을 봉사·구제(19.4%)보다 훨씬 앞에 두었고, 가장 먼저 고칠 점으로는 공공의 이익보다 교회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24.0%)를 꼽았다. 사회는 교회가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공공선에 대한 책임은 더 무겁게 묻는다. 정치 참여와 공적 책임을 구별하는 일, 특정 진영에 동원되는 교회가 아니라 공동선을 섬기는 교회를 말하는 일이 바로 공공 신학의 몫이다.
그런데 내 눈을 붙든 건 다른 숫자였다. 교회를 극단적이라고 본 이들은 그 이유로 이주노동자와 타 종교를 향한 혐오와 배타성을 58.0%나 꼽았다. 원문의 항목은 '나와 다른 집단(이주노동자, 다른 종교, 다른 정치 성향 등)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배타성'이며, 이 문항은 교회를 극우로 평가한 응답자 471명을 대상으로 했다.
신뢰 회복을 위해 고쳐야 할 점으로도 '타 종교에 대한 태도'가 22.1%로 두 번째였다. 한국 사회는 교회의 공공성을 낯선 이웃을 대하는 태도로 재고 있었다. 국내 이주 무슬림 근로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항목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복음을 들고 다가가야 할 이웃이 교회의 언어 속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치의 문제이기 전에 복음의 문제다.
그러면 왜 이슬람인가
여기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를 나란히 놓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슬람은 공공성을 다른 문법으로 말하는 종교다. 이슬람 전통은 신앙과 법, 공동체 질서를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편차는 크다. 반면 기독교 공공 신학은 카이퍼의 영역주권이 보여 주듯 강제가 아니라 증언으로 공적 영역에 들어선다. 이 두 개의 문법을 곁에 놓으면 기독교가 말하는 공공성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가 또렷해진다.
▶둘째, 두 종교는 모두 소수자로 사는 법을 고민해 왔다. 1990년대 이후 타하 자비르 알알와니, 유수프 알카라다위 같은 학자들은 비무슬림 사회에 사는 무슬림을 위한 '소수자 법학(피크흐 알아칼리야트)'을 체계화했다. 기독교에는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들이 끌려간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기도하라는 부르심이다(렘 29:7). 이 비교는 논쟁의 전선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무슬림 이웃 앞에서 어떤 공적 존재가 될 것인지를 묻기 위한 것이다.
공공 신학은 진보 신학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복음주의 자신의 유산이다
1974년 로잔 언약은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고백했다. 1880년 아브라함 카이퍼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삶의 영역은 한 뼘도 없다고 선언했다. 1987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세운 기윤실은 그 고백을 운동으로 옮긴 사례다. 복음주의 공공 신학의 본질을 성육신 신학에서 찾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요 1:14), 교회의 말도 세상이 알아듣는 몸을 입어야 한다.
이후는 그 원리를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세운다. 오랜 기간 무슬림 사이에서 복음을 옮겨 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일을 '상황화'라는 이름으로 배웠다. 세계교회협의회 베드포드-스트롬 의장은 공공 신학의 요건으로 성경의 언어와 공적 영역의 언어를 아울러 구사하는 '이중 언어 능력'을 제시해 왔다.
선교 현장의 말로 바꾸면 그것이 곧 상황화다. 진영의 기술이 아니라 현장 사역자의 기술이다. 나는 그 길의 첫 디딤돌을 '영역 선교'에서 찾는다. 공장의 동료로, 식당의 손님으로, 이웃집 가장으로 우리 곁에 온 무슬림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자리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가 된다.
이제 모든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교회의 평안만 구하는 성도인가, 아니면 낯선 이웃이 사는 그 성읍의 평안까지 구하는 선교사 적인 삶을 사는 자들인가.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